틈만나면 제주로 여행을 다니다가 서귀포에서 일하기 위해 처음 내려왔던 날, 저는 그저 아름다운 섬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습니다.
푸른 하늘과 스푼으로 푹 떠먹은 푸딩을 닮은 독특한 오름들, 순하고도 단단한 사람들.
그 속에서 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생각에 가슴이 벅찼습니다.
당시 일하던 게스트하우스의 입구 한 켠에는 산소 네 기가 있었어요.
그곳은 마을 어귀, 곧 도로와 이어지는 밭이었습니다.
유리문을 닫고 방 청소를 하다가도 문득 힘들 때도 자주 찾던 곳.
이상하게 나 혼자인데도 오늘은 이랬어요, 처럼 말을 걸며 인사를 하게 되던 그 곳.
그 시간을 지나며 시 한 편을 쓰게 되었지요.
제목은 <피피, 잠들다>, 제 데뷔작이 되었습니다.
그 시를 쓸 때 느꼈던 감정이 새삼 떠오릅니다.
그때 어렴풋이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. 그리고 4·3도, 많은 기억들도 그저 과거만은 아니다,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.
오늘은 제주 4·3이 일어난 날입니다.
제주가 겪은 가장 깊은 비극이자, 여전히 완전히 수습되지 않았고 모두가 마주해야 할 상처입니다.
4·3은 단순히 한 사건의 이름이 아닙니다.
무려 7년간, 공권력에 의해 이름 없는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갔던 사건과 그 이후의 시간 모두를 아우릅니다.
공식 통계로만 3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고,
그중 대다수가 민간인이었습니다.
그 무명의 죽음과 가족들을 기억하는 일, 애도하는 일, 소리내어 말하는 일이
오늘을 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.
이런 마음을 더 깊이 일깨워준 책이 있습니다.
바로 한강의 『작별하지 않는다』입니다.
소설은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던 진실을
시보다 섬세한 문장으로 절절하게 우리 앞에 데려옵니다.
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.
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.
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.
— 한강, 『작별하지 않는다』
주인공은 어느 날 친구의 전화를 받고
그녀의 새 두 마리를 구하기 위해 눈이 쏟아지는 제주 중산간 마을로 향합니다.
그 여정 속에서 우리는
‘누군가의 고통을 함께 기억한다는 것’의 진정한 의미를 마주하게 됩니다.
제주에 산 지 벌써 13년이 되었습니다.
이제는 제 일상과 감정, 글과 몸 속에도 이 섬이 오롯이 스며 있습니다.
그런데도 여전히 4·3을 마주할 때면 무엇인지 모를 불편함이 있습니다.
진실이 있는 곳에 생겨나는 불편함에 대해,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.
진실을 들여다보고, 그것을 기억한다는 건
이 불편함을 견디고 넘어서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.
그래야 ‘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’ 다짐하고 행동하게 되니까요.
그래야만 그분들의 죽음이 그저 ‘말소’되지 않으니까요.
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.
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, 아직은.
— 『작별하지 않는다』
4월에는 꼭 『작별하지 않는다』 를 읽어보시길 권합니다.
제주의 아픔과 인간인 우리가 나누어야 할 책임을
담담하면서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일러준 한강 작가에게 감사를 전합니다. 인간이 무엇인지를 기꺼이 생각하게 하고 돌아보게 하는 놀라운 글을 쓰는 한 인간이 있다는 사실, 그토록 힘든 국가 폭력의 현실을 하루하루 건너온 사람들을 주목하고 그들에게 공감하며 마치 내 이야기인듯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낸 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습니다.
제주 여행 중 혹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를 하나의 무덤, 비석들, 한 사람의 침묵 앞에서
‘나도 잊지 않고 있다’는 작은 인사를 전해보면 좋겠습니다.
이 글은 블로그 <의식적인 삶> 프로젝트의 일부로, 나만의 루틴을 통해 일상을 더 여유있게 살아가려는 모든 분을 위한 글입니다.